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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 이승만 대통령의 주요 업적 30가지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 공산화를 저지
올인코리아 편집인/skstjdeo 일베회원   |   2013-04-02
국부 이승만 대통령의 주요 업적 30가지: http://www.ilbe.com/1018896506

1. 최초의 우리나라 일간지 '매일신문' 창간



- 1898년에 창간되었던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은 당시 발간되고 있던 <협셩회회보>를 개제하여 창간한 우리 나라 최초의 일간신문이었다. 사장에는 양홍묵, 기재원(記載員:지금의 기자)에 이승만, 최정식, 회계에 유영석 등이 참여하였다.

그 이후에 이승만은 주필과 사장직을 맡아 활약하였고, 독립협회 산하의 만민공동회를 통해 부패·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독립·민권사상을 고취하는 등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이러한 개혁운동을 벌이던 끝에 1898년 11월에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종9품)에 임명되었다.

2. 미국 유니버시티 프레스에 한국인 최초로 논문을 출간(프린스턴대 박사학위 논문)



- 이승만은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d)>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는 1776년부터 1872년까지의 국제법상에서의 전시중립을 다룬 것이었는데, 이승만의 전공은 국제법이었으며, 부전공은 미국 역사와 서양사였다.

그의 논문은 1912년 프린스턴대학 출판부에서 출판이 되었는데, 이는 높은 학문적 평가를 받은 것을 입증한 것으로 한국인으로는 최초였다. 이로 인해서 이미 미국에서는 유명세를 타게 되었고,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제정치학자가 되었다.

3. 미국 하와이에 한국 최초의 남녀공학 학교인 한인기독학원을 설립



- 1914년 7월 이승만이 하와이 호놀룰루에 기숙사를 설립하고 각 지역에서 이곳으로 와서 공부하던 여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교육한 것이 그 모체가 되었다. 다음해에 대한인국민회의 지원으로 3에이커의 토지를 구입, 교실을 건축하였으며, 기숙사도 새로 마련하였다.

1916년 3월 1일에는 기숙사명칭을 한인여자성경학원(韓人女子聖經學院)으로 개칭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남녀공학제 학교였으며, 이 과정에서 3만달러의 건축비 결손이 나자 이승만은 학생고국방문단을 결성, 조국에 파견하여 이를 충당하였다.

4. 곧 독립할 것이라며 무국적을 선택(중국, 미국 국적을 가졌던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 해외에 있던 당시 대부분의 주요 독립운동가들은 편의상 중국 국적이나 미국 국적을 가졌는데, 이승만은 끝까지 중국 국적도, 친미파였음에도 미국 국적도 갖지 않고 무국적자 망명객 신분으로 살았다. 예컨대 김구는 대표적인 중국 국적 독립운동가였고, 안창호와 서재필의 경우 대표적인 미국 국적 독립운동가였다.

때문에 이승만은 미국에서 미국 밖으로 나갈 때마다 번거로운 절차를 밟아야 했고, 그때마다 미국 국적 취득을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권유를 받았지만, 한국이 곧 독립될 것이므로 필요가 없다며 거절하고는 했다.

5.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중경 임시정부에 요청하여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도록 독려



- 많은 사람들이 단지 임시정부 자체에서 선전포고를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3대 독립운동 노선에서 박용만이 무력투쟁론, 안창호가 실력양성론이었다면 이승만은 외교독립론의 축에 속했다. 그는 외교적으로 독립을 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데, 예컨대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하자 중경 임시정부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도록 독려한 것이 대표적인 예였다.

그는 외교적으로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함과 동시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해야 비로소 해방 이후에 우리나라가 자주적인 독립을 할 기회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고, 이를 요청했다. 중경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일본선전포고를 하였다.

6. <일본내막기>라는 책을 통해 한국인으로서 미국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일본의 미국 침공을 이미 3년 전에 예견



- 이승만은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라는 책을 미국에 출간했는데, 이 책은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관심도 받지 못하는 그런 책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누차 강조를 하는 이승만의 책은 그 이후에 미국에서 불티가 나게 팔려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를 내는 기념을 토했다.

이미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기 이전인 1939년 11월쯤부터 집필에 몰두한 끝에 1941년 여름 뉴욕에서 이승만이 출간한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은 그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고 높이 평가를 받는다. 사실, 출간 당시 미국에서는 오히려 혹평이 쏟아졌었던 책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경고대로 미일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에서는 연일 그의 선견지명이 이슈가 되면서 그 책은 이승만이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데에 큰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되었다.

7. 외교독립론을 통해 카이로 선언문(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논의)을 기초하는 데 영향을 줌



- 외교독립론을 통해 이승만은 미 상원 부속교회 목사인 프리드릭 브라운 해미스 같은 거물급 감리교 지도자들을 통해 한국의 독립의지를 미국정부에 전달하였다. 그 결과 루스벨트 대통령의 최측근인 독실한 감리교도인 해리 홉킨스가 작성한 원고를 영국 대표가 약간 수정함으로써 나온 것으로, 우리나라와 관련된 내용을 기초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카이로 선언문은 덕분에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논의하고, 또 인정한 것으로 일컬어진다.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 영국· 중국의 3개국이 "한국인들의 노예상태를 유념하여 적당한 절차에 따라 독립을 허용할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이 반길 때 이승만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의구심을 품었다.

즉, "카이로 선언의 '적당한 절차'라는 문귀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명확히 밝혀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정부로부터는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미 국무부에 서한을 보내기도 하고, 또 성명서를 밝히기도 했다. 이승만이 걱정했던 이 논란이 된 문구는 훗날 신탁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8. 미국 OSS의 굿펠로우 부장과 협력, 국내진공작전인 김구의 독수리 작전과 소수정예를 공수부대처럼 침투시키는 냅코계획을 성사시킴



- 이승만은 흔히 외교독립론자로 무장투쟁을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는 일본군과 싸울 한인 전투부대를 창설하려고 노력했다. 무장투쟁이 중경의 임시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을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군 정보조정국(COI)에 대해 재미한인들로 독립적인 특수부대를 창설해서 일본에 대한 전투에 투입시켜 줄 것을 계속 요청했다. 미군과의 연결은 나중에 그 기구의 중국 책임자가 된 에쓴 맥도웰 게일과 알게 되면서 이루어졌다. 에쓴 게일은 이승만이 한국에 있을 때 아주 가까이 지내던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조카였다.

게일을 통해 이승만은 그 기구의 책임자인 도노반과 2인자인 프레스톤 굿펠로우와도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1941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열린 여러 차례의 정보조정국 회의에도 직접 참석해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미국 육군의 전략정보처(OSS)는 ‘독수리계획’이나 ‘냅코(NAPKO)계획’과 같은 특수유격훈련 계획을 마련하고 이 훈련을 마친 한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반도에 진공하는 작전을 세웠다.

독수리계획은 중국에 있는 광복군을 한반도에 침투시키는 것이고, 냅코계획은 미국 하와이의 한인을 한반도와 일본에 침투시키는 것이었다. OSS는 이들 계획을 집행하기 위해 광복군 안에 한미합동지휘부를 세웠다. 대체로 1945년 4, 5월께 실천단계에 들어간 이들 계획에는 김우전(현 광복회 회장)과 유일한(유한양행 창업자) 등도 참여했다.

9.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북한의 공산화를 저지



-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1946년 6월 3일에 했던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강력히 주장한다. 이러한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최근까지도 그가 분단의 원흉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소련의 극동문서고들에서 여러 문서들이 개방됨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의 이러한 안목은 오히려 현실적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예컨대 이미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를 가지기 이전인 1945년 9월 20일부터 북한에 독자적인 정치조직을 만들려는 생각을 했으며, 그것은 1945년 10월 초순부터 노골화되어 1946년 초에는 실제로 실질적인 기반을 거의 구축했다. 정확히 따져보면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 서울의 덕수궁에서 열렸는데, 이는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에 통일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회의로 알려졌다.

하지만 훗날 이 미소공동위원회의 목적은 애초에 소련이 한반도 분단의 원흉은 미국과 이승만임을 국민들에게 각인을 시켜 책임을 떠넘김으로써 보다 소련에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고자 하는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회의가 시작될 때부터 이미 소련군 대표 스티코프는 한반도에 적대적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었던 것이다.

유럽의 경우를 본다면, 스탈린은 서구열강과 가진 협상에서 동유럽의 정치적 자율권, 즉 민중들의 선택에 따른 결정을 허용한다고 밝혔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소련은 협상을 깨고, 동유럽 국가들에 있었던 민주주의자들을 모두 숙청하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는 이를 통해 소련의 공산주의만을 위한 정부를 수립했다.

10. 대한민국에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초석을 닦았음



-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초석을 닦았는데, 여러 논의를 거쳐 대한민국의 최초 헌법이 탄생하였다. 이 헌법을 통해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은 군주제가 아닌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공화국'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으며, 국민들은 대부분의 근대 국가가 보호하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인 자유, 평등, 재산, 교육권 등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적인 토대로 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노동자의 이익균점권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주요 자원이나 산업에 대한 국유 내지 국, 공영의 원칙을 천명하였다. 또한 경제 사회적 민주주의의 요소도 혼합하여 사유재산제를 인정하면서도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과 같은 사회주의적 요소도 인정하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한민당이 추대해서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이 만든 한민당과 반대되는 행보를 보이자 한민당은 야당으로 돌아섰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세력을 결집시켜 여당을 형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당이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수호했음에도 처음에는 (물론, 측근들의 반대로 무마되고 자유당이 되었지만) 노동당을 생각했을 정도로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를 하고자 했었다. 이렇듯, 이승만 대통령의 제1공화국은 우리가 현재에도 누리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토대와 기초를 쌓았다고 할 수 있겠다.

11. 의원내각제가 아닌 대통령중심제로 적용시키고 거기에 내각제적 요소를 혼합시킴



- 1948년 5월 10일에 5.10 선거를 통해 국회가 구성되었는데,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제헌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 제헌 작업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유진오인데, 그는 한민당의 의견을 반영하여 애초에 헌법의 권력구조를 내각책임제로 만들었다. 원래 다수의석을 차지한 한민당으로서는 내각책임제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각책임제가 된다면 대통령은 허울뿐인 대통령이 될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건국을 하고 또 부국을 하려면 영국과 프랑스와 같이 자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했다. 대통령 중심제가 있어야 건국의 틀을 잡는 과정에서 강력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데, 내각책임제로 갈 경우 강력한 정책은 의회에서 흐지부지가 되어 추진이 불가능할 가능성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나 개인의 권한이 위축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러한 이유로 그는 내각책임제에 반대했다. 그는 대통령 중심제를 원했는데, 한민당은 이승만이 없으면 자신들이 권력을 유지하기도 힘들 뿐더러 자신들이 밀어준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의 뜻대로 했다.

이로 인해 헌법의 권력구조는 대통령제로 급선회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한민당의 요구를 전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제로 채택을 하되, 내각제적 요소가 다분히 섞인 대통령제 헌법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대통령제는 지금까지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12. 장관의 각료내각을 편중되지 않고 통합적으로 구성(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난 초당파적)



-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초대 내각을 구성하면서 어느 당에도 편중이 되지 않는, 통합적이고도 거국적인 내각을 조직했다. 예컨대 그는 공산주의 경력이 있는 사회주의자로 논란이 있었던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에 파격적으로 기용했는데, 이러한 면모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내각을 미루어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국무총리로 북한에서 월남한 지역적, 당파적 기반이 없는 이윤영 목사를 추천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윤영 목사는 결과적으로 국회의 인준거부로 국무총리직을 맡지 못했다. 그 다음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을 추천하여 이범석이 국무총리를 맡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을 추대해준 한민당 소속의 장관은 2명밖에 기용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한민당이 돌아서버리고 야당이 됨으로써 최초의 여야 정치제도가 확립되었다.

13. 소작제도를 철폐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을 확립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농민들의 자주성을 부여하고 생산력을 증가



-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개혁은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에 아주 중요했다. 예전에 우리나라보다 잘 살았던 국가로 인식되는 필리핀의 경우, 토지개혁이 실행되지 못해서 지주층이 사회상류층으로 그대로 존속하게 되어 지금과 같은 가난한 국가가 되었다고 평가를 받는다. 파키스탄 또한 아직 봉건적 잔재가 많아서 제대로 발전이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지금과 같이 선진국과 나란히 할 수 있는 국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 기틀을 마련한 것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고 그의 토지개혁 때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개혁은 농민과 자본주의를 살리는 개혁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개혁은 농민과 사업가를 구해 신생 대한민국 경제 건설의 토대를 이룬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화를 막으려면 토지개혁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관계 장관들에게 입버릇처럼 채근하곤 했다.

실제로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간발의 차이로 거의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는데, 그 덕분에 농민들이 6.25전쟁 도중 북한이 점령한 우리나라 땅에서 토지개혁 선전에 농민들은 현혹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농민들이 대한민국에서 대거 이탈하지 않았고, 또 당시에는 농민의 국가로 알려진 공산주의 국가 북한으로 넘어가지 않고 대한민국을 지킨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시행된 '농지개혁에 대한 임시조치법'은 그야말로 민주적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임시조치법은 지주의 삶을 보장하면서도 농민에겐 자신의 토지를, 사업가에게는 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해 경제건설 기회를 준 일거삼득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만약, 한민당에 포진한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을 견제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14. 6.25전쟁이 일어난 뒤에 군최고통수권자로서 뛰어난 리더십을 보임



-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이 발발했을 당시에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이승만 대통령은 전적으로 지원을 받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주고 있는 미국에게 오히려 큰소리를 치면서 전쟁의 주도권을 행사했다. 또한 그는 유엔군의 원활한 지휘를 위해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위임하였으면서도, 반공포로 석방 등 그때그때의 전황에 따라 전쟁지도를 융통성 있게 실시했다.

그는 친미로만 일관을 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이익을 위해 처신하고 행동했다. 또한 그의 위기시 전쟁지도력이 매우 뛰어나 밴 플리트의 후임으로 미 8군사령관이었던 맥스웰 D. 테일러는 "한국의 이승만 같은 지도자가 베트남에도 있었다면, 베트남은 공산군에게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승만 대통령을 칭찬했다.

실제로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당시에 국군통수권자로서의 역할과 소임을 다했다. 예컨대 그는 80세를 바라보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매주 전선시찰을 통해 장병들을 격려하여 사기를 진작시켰다. 실제로 당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밴 플리트는 자신이 재임했던 2년에서 평균 1주일에 1번씩은 꼭 함께 전방과 훈련지역을 빠지지 않고 시찰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는 폭염이나 혹서 등 계절이나 기후와 관계없이 전선지역을 방문하고 격려했다. 한 번은 낙동강전선의 최대 위기인 영천 전투가 끝날 무렵에 이승만 대통령이 영천의 국군8사단을 격려했는데, 주변에는 적의 박격포가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또 그는 1952년 10월에 중부전선 철원지역에서 백마고지를 두고 중공군과 혈전을 벌이던 국군9사단을 방문하여 격려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9월에 중동부전선의 최대 격전지인 단장의 능선 전투를 앞둔 장병들을 격려하고자 부산에서 강원 양구지역의 펀치볼까지 쌍발기와 연락기를 번갈아 타고 최전선지역을 방문했다. 그는 노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바로 이러한 모습 때문에 그는 국군과 미국 장성들의 절대적인 충성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15. 6.25전쟁 중에 일본이 야욕을 드러내자 독도를 지키는 평화선인 '이승만 라인' 선포



- 6.25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경계선을 표시하여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은 불법으로 점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평화선은 해안에서부터 평균 60마일에 달하며, 이 수역에 포함된 광물과 수산자원을 보존하기 위하여 설정한 것이었다.

어업기술이 월등한 일본과의 어업분쟁의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하고 공산세력의 연안침투방지는 물론, 세계각국의 영해확장과 주권적 전관화 추세에 대처하기 위한 정책적인 배려에서 선언되었다. 평화선이 선포되자 처음에는 일본어선의 침범조업이 적었으나, 몇 개월 후 다시 급증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해 7월 18일 선포수역에서 조업하는 외국어선은 국적을 불문하고 나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6. 6.25전쟁 중 미군에 의한 일본군과 대만군의 국내주둔 및 지원의사를 완강히 거부



- 1951년 1월 4일에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하게 되자, 미군 수뇌부는 유엔군에 일본군을 비롯한 대만군의 편입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알게 되었고, 대노했다. 1951년 1월 12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수뇌부에게 "만일 일본군이 참전한다면 국군의 총부리를 일본군에게 돌려 일본군부터 격퇴한 다음에 공산군과 싸울 것"이라며 완강하게 반대했다.

또한 장개석의 자유중국군의 지원에 대해서도 "한국전선에 일본군을 끌어들일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러한 우려는 과거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에서 나온 것이었다. 과거 조선의 조정이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을 위해 청나라군을 끌어들였다가, 청나라군의 개입을 명분으로 일본군이 톈진조약에 근거하여 개입하였던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내에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끌어들인 그 일을 계기로 한반도에서는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일본군이 승리하여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중국군에 의해 밀리는 상황에서도 일본군과 대만군의 개입을 강력하게 반대했고, 결국 미군도 이 계획을 포기했다.

17. 전쟁중임에도 직선제를 통한 민주선거로 제2대 대통령에 취임, 민주정치의 발전을 꾀함



- 1950년 6월 25일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낙동강까지 밀렸다가 압록강까지 밀어붙였고, 그 뒤에 다시 중국군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였다. 그 과정이었던 1952년 8월 5월에 제2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치뤄졌다. 그 과정에서 부산정치파동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져 민주주의를 훼손했다고 여겨지지만, 6.25전쟁을 하던 도중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파동은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느냐, 간선제로 뽑느냐로 우리나라의 정치사에서 역사적 선례로 작용할 것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대통령 중심제냐, 내각책임제냐의 문제와 같이 말이다. 야당 일각에서는 전쟁통에 총리였던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대통령제에서 내각제로 돌아서려는 움직임도 보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미국은 우리나라가 분단의 상황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바로 위에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내각제와 맞지 않는다고 봤다. 그러나 야당은 장면 옹립 및 내각제 개헌시도를 했고, 이에 맞서 이승만은 1952년 5월 14일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내놓았다. 국민들의 의사를 물어보자는 취지와 동시에 자신의 정권을 연장하여 전쟁을 효율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유에서였다.

부산정치파동도 터지면서 여러 논란이 되다가, 미국도 이승만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1952년 7월 4일에 국회는 재적의원 185명 중 166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립 표결한 결과 163명이 찬성, 기권이 3명으로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었다. 이렇게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는 도입되었다. 이렇게 새 헌법에 의거해 8월 5일 시행된 선거에서 이승만은 74.6%인 523만여 표를 획득하여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로써 전시라는 국가가 절체절명하는 총체적인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선거를 통해, 그것도 간선제가 아니라 국민들이 직접 뽑는 직선제를 통해서 대한민국의 제2대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들이 우리나라의 민주정치가 보다 발전하도록 하는 데에 이바지 했다고 볼 수 있겠다.

18. 반공포로석방으로 외교적 성과를 얻고 자주적인 면모를 과시



- 반공포로석방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이 자주적인 면모를 세계에 과시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예컨대 남한의 모든 사람들은 휴전협정을 반대했고, 이승만도 그러했다. 그런데 미국은 휴전협정에서 한국을 배제하고 자신들이 북한과 대신 협정을 체결하려고 했다. 즉, 우리나라의 의사결정권을 깡그리 무시한 처사였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하나의 자주적인 독립국임을 과시함과 동시에 반공포로들을 생각해서 독단적으로 석방을 한다. 이 사건으로 미국 등 자유우방국과 공산권 국가들은 이제까지 공을 들여 온 휴전이 백지화가 될까봐 우려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원용덕 장군을 경무대로 불러 그들을 석방하라는 친필명령서를 직접 전달했고, 1953년 6월 18일 0시에 개시되었다.

이에 우리나라 국군은 아군인 미군을 제압한 이후에 27,000명을 석방시키고 그들을 남한의 국민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나라는 이 반공포로석방으로 외교적 성과를 얻고 자주적인 면모를 과시하게 되었다. 또한 휴전협정 체결을 위한 조건부 성과를 미국으로부터 얻어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었다.

19. 휴전협정 체결로 2억 달러 부흥 원조와 한국지상군 20개 사단 증강,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성사



- 6.25전쟁 직후 국군은 크게 발전했다. 예컨대 해군은 전쟁 당시에 4개 정대에 33척의 함정으로 보유하고 있었지만, 휴전 무렵 해군은 6개의 전대를 기간으로 한 1개의 함대를 창설했고, 병력도 6,954명에서 12,000명 수준으로 증강됐다. 공군도 1개의 전투비행단과 1개의 훈련비행단 등 2개의 비행단으로 성장했고, 비행기도 F-51전투기 80대를 포함하여 총 110대의 항공기를 보유했다.

병력도 1,897명에서 11,000명으로 증원됐다. 이는 전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었던 결과물이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얻어 낸 일종의 전리품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앞서 언급된 반공포로석방을 통해 미국에게 자주적인 권리를 천명했고, 또 자신들이 휴전을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미국은 휴전을 성사하는 조건부로 이러한 각종 병력과 물자를 지원해준 것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대표적인 외교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물질적인 것들 뿐만이 아니었다. 휴전협정에 찬성하는 대신에 이승만 대통령은 2억 달러에 달하는 부흥 원조와 한국지상군 20개 사단 증강과 같은 성과를 냈다. 이러한 것들은 한미합의의사록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또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미국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조약을 이승만이 체결하도록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불러내어 확실한 군사적 안전 보장을 받아냈다. 즉, 미군을 서울 북방의 서부전선에 배치하여 일종의 인계철선 역할을 하여 북한군이 다시 남침을 한다면 자동개입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전후에는 미국으로부터 추가로 전후에 7억불의 차관을 얻어냈다.

이러한 이승만 대통령이 주도하여 얻은 우리나라의 군사적 안정 및 경제적 지원이 뒷받침이 되지 않았다면, 그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어려웠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의 이 업적은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못지 않게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끼치며 우리가 득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 충주비료공장과 문경시멘트공장, 인천판유리공장 등을 준공하여 중화학공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



-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이 일어난 직후에 충주비료공장과 문경시멘트공장, 인천판유리공장을 준공하였다. 그럼으로써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 핵심적인 사업이 된 중화학공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예컨대 당시에 중공업은 북한이 79%, 남한이 21%의 비율로 매우 비대칭적으로 분포되어 있었고, 금속 공업의 경우엔 90% 이상이 북한에서 생산되었다. 남한에서는 오로지 방직공업 생산 부문에서만 북한에 앞서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나라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1956년부터 수입대체산업 정책이 본격화가 되었다. 이를 통해 국내 산업시설의 육성을 위한 기반, 즉 박정희 정권 때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평가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여느 지도자들과 달리,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우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지원금을 모두 문경시멘트공장, 충주비료공장, 인천유리공장 등의 발전사업 건설에 사용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사회간접자본의 건설에 밑거름이 됐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만은 없는 사안이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격차가 현격한 일본과의 국교재개를 초기에 반대함으로써 그후 일본경제에 대해 상대적 자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 그 이후인 박정희 정권에는 어느 정도의 구축을 해놓은 상태에서 국교를 재개했기 때문에 일본에게 종속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정책으로 그가 통치한 1953년에서 1960년 사이에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4.9%로 비슷한 수준의 후진국들의 평균성장률 4.4%를 조금 상회했다. 또한 제조업 성장률은 12.4%였다. 이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은 원조자금을 착복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국가의 토대를 건설했고, 또 이러한 사회기반설비와 교육으로 만든 인적 인프라는 산업화의 토대가 되었기에 아주 중요한 업적이라 하겠다.

21. 한국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여 지금의 세계적인 원자력 국가의 토대를 닦음



- 이승만 대통령의 직접적인 지시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연구소인 원자력 연구소는 국민소득이 겨우 80불이던 당시 원자력 연구에 적극적 지원을 하여 발전을 시켰는데, 현재 우리나라 원자력은 세계 6위로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1950년대 한국은 전쟁의 여파로 인하여 춥고 배고픈 시절인 만큼 에너지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1948년 5월 14일 북한이 대한민국에 대한 송전을 중단하여 미국이 발전 군함을 부산 항에 정박시켜 전기를 공급했을 때만 해도 한국에는 발전 설비가 없었을 정도였다. 그 이후에 원자력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주목한 이승만 대통령은 국내 우수한 인재들을 선발해 원자력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냈고 이들이 귀국할 무렵부터 본격적인 원자력 연구를 지시했다.

이에 따라 1958년 원자력법을 제정하였고, 1959년 1월 21일 장관급 부처인 원자력원을 설립했다. 또한 3월 1일 원자력 연구소(지금의 한국원자력연구원)를 세웠다. 같은 해 7월 14일 이 연구소 안에 미국에서 들여올 연구용 원자로 ‘트리카 마크Ⅱ’를 설치하기 위한 기공식을 가졌다.

현재 미국이 103기, 프랑스 59기, 일본 54기, 그리고 러시아 30기, 독일 17기에 이어 우리나라가 4곳에 20기로 그 다음이다(설비용량 기준). 세계 최초 원자력 발전소는 1956년 영국에서 가동됐고, 현재 세계 31개국에서 443기의 원전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이러한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원자력 발전의 역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그 토대를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2. 1953년 인하공과대학을 설립해 문과를 강조하던 전통을 바꾸어 공업을 발전시키고자 설립



- 6.25전쟁이 끝난 이후인 1954년에 우리나라의 공업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발의로 인하공과대학이 설립되었다. 학교 설립에 필요한 재원은 하와이 교포 2세 교육을 위하여 1914년 이승만이 설립·운영하였던 한인기독학원을 처분한 대금, 하와이 교포들의 성금, 국내 유지의 성금 및 국고 보조 등의 기금으로 충당하고, 인천시로부터 교지를 기증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기존에 우리나라가 강조하던 문과쪽에서 탈피하여, 앞으로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위해 필요한 인재들인 공학도들을 기르고자 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과거 조선에 얽매인 대한민국의 구습타파를 통한 정신혁명과 실용주의를 강조하며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이 사업이 이미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기념사업으로 출범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인하'라는 대학의 명칭도 '인천의 하와이'라는 뜻으로 정했다. 그 결과, 인하대학교는 현재 대학개혁, 교육 인프라 구축, 세계화 등을 높이 평가 받아 2004년과 2006년 <중앙일보>에서 실시한 국내대학평가에서 9위를 기록하였다. 또 2010년 <조선일보>-QS 아시아대학평가에서 83위, QS 세계대학평가에서는 443위를 기록하였다.

미국의 로드아일랜드 대학과 워싱턴 대학, 중국의 난징 대학[南京大学] 대학, 일본의 와세다 대학[早稲田大学] 등 7개국 8개 대학이 ‘글로벌 U8 컨소시엄’을 결성하여 학생교류, 커리큘럼 공동개발, 교수교류 등 활발한 인적 교환 및 학술교류를 진행하고 있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며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적인 공과대학으로 발돋움을 하고 있다.

23. 전후 의무교육을 실시해 초등학교가 2800개에서 4600개로 10년도 되지 않아 신설되어 136만에서 360만으로 증가했고, 대학도 19개에서 68개, 대학생은 8천명에서 10만명으로, 중학교는 10배, 고등학교는 3.1배, 대학교는 12배로 늘어났다. 또 문맹퇴치운동을 통해 1948년 문맹률 80퍼센트에서 1959년 22.1퍼센트로 줄임



- 1950년대에 정부 예산을 살펴보면 그 중 절반가량이 국방비로 지출되었음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교육 예산을 약 20% 정도로 유지하는 과감한 예산 운영을 보여준다. 이는 당시 교육을 무엇보다 중요시한 이승만의 강력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러한 예산을 바탕으로 교육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확충해나갔다.

그 자신이 상당한 고학력의 인텔리였기 때문의 교육의 중요성을 알았던 것이다. 그 결과 전후 의무교육을 실시해 초등학교가 2800개에서 4600개로 10년도 되지 않아 신설되어 136만에서 360만으로 증가했고, 1945년 80%가 넘던 13세 이상 문맹률이 1959년에 가서는 15~20%까지 낮아졌으며, 초등학교 취학률은 1946년 53.4%에서 1958년에는 95.2%의 완전 취학에 근접한 모습을 보여주며 초등교육 의무화를 이루어냈다.

더욱 놀라운 것은 1948~1960년 고등학교와 대학교 진학률이 4배 이상 오르고 대학의 수도 19개에서 68개로 급증하면서, 이승만 정권 말에는 대학진학률이 당시 제 2의 경제대국이었던 영국보다도 높은 수준을 달성하는 등 기적 같은 모습을 연출했고 당시 인구 5천만이던 영국의 대학생 수와 맞먹는 규모의 대학생 수를 자랑했다.

예컨대 대학생은 8천명에서 10만명으로 대폭 늘어났으며, 중학교는 10배, 고등학교는 3.1배, 대학교는 12배로 늘어났다. 현재 일반적으로 국내외, 그리고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대한민국의 교육시스템의 체계와 기초를 다진 인물을 공통적으로 모두 이승만 대통령으로 꼽고 있다.

24. 독실한 기독교인이면서도 기독교, 불교, 유교를 포용하고 아우르는 정책들을 펼침



- 이승만 대통령은 대표적인 기독교 신자로서 매우 유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교적인 차별을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통합적인 분위기를 보였는데, 예컨대 그는 불교도들을 내각에 다수 등용하기도 했다. 또한 불교 사찰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인 관리를 했으며, 사찰을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만들고자 관광지 유치를 위한 투자를 했다.

또한 그는 불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통과 관련된 유교에도 관심을 보이며 이를 강조하였는데, 대표적으로 그는 삼강오륜을 강조하면서 국민들이 행실을 올바르게 하기를 원했다. 또한 명심보감을 따로 중국에서 들여와 번역을 시킨 다음에 배포하도록 하는 등 종교를 가리지 않고 국가의 이익과 연관된다면 강조하고 또 추천하여 실용주의적 노선을 걸었다.

불교의 경우 교단 정화로 인해 일제하 식민지 불교의 잔재인 대처승이 배제되고 비구승 중심의 불교 전통이 회복되었다는 점은 이승만 대통령이 만든 긍정적인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념 및 명분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진행 과정과 방법상의 문제로 인한 후유증으로 오늘날까지도 아쉬운 그림자를 길게 남기고 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에 불교의 사찰인 용암사를 방문하고 참배하여 남북통일과 후손 잇기 기원 기념으로 동자상과 7층석탑을 그곳에 세우기도 했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적혀져 있는 석판이 용암사에 아직도 존재한다.

25. 전후 56종의 일간신문과 177종의 월간지를 포함하는 411종의 언론 매체가 활동하며 언론의 자유를 허용



- 우리나라의 언론의 자유는 제1공화국에서 비롯되었다. 예컨대 미군정이 검열을 없애는 등 언론의 절대적 자유를 선언한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자유민주주의 언론의 이념적 토대가 됐다. 미군정의 이념을 이어받은 제1공화국은 좌우익 대립 상황과 권력유지를 위해 원시적 방법으로 언론을 탄압했지만, 법과 제도 등 조직적인 언론정책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이승만 정권 당시에 6.25전쟁 이후 총 56종의 일간신문과 177종의 월간지를 포함하는 411종의 언론 매체가 활동하였는데, 이러한 언론의 자유와 보장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발전하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국가보안법을 구실로 경향신문을 폐간시키기도 하는 등의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 폐간된 경향신문이 야당이었던 장면의 며느리가 경향신문 사장인 한창우의 딸이었던 만큼 야당에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그 반대로, 경향신문은 여당과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즉, 당파적이었고, 편향적이었다. 사상계라는 월간잡지 역시 이승만과 대립하는 야당쪽 흥사단 계열의 잡지였기 때문에 당시의 언론은 극도로 편파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분명 이승만 정권의 언론에 대한 탄압은 과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야당에 대한 편파적인 보도도 역시 과했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여러 언론들을 인정하고 또 활동을 하게 놔두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지며, 또 언론과 관련해서 법과 제도 등 조직적인 언론정책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숙지할 필요가 있겠다.

26.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외국인으로서 전례 없는 백만 군중의 환영을 받는 카퍼레이드를 함



- 6.25전쟁이 끝난 1954년 7월 26일, 아이젠하워와의 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은 8월 2일에 뉴욕시가 주최한, 다운타운 브로드웨이 일대에서 하는 티커테이프 퍼레이드에 참석했다. 이 퍼레이드는 일명 '영웅행진'이라고 불리우는 퍼레이드로 역사적으로 인류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인물들을 위해 베풀어지는 영광의 카퍼레이드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맥아더 원수, 드골의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해 달착륙 우주인들이 이 퍼레이드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한인 최초의 뉴욕시 영웅행진의 영광을 누린 사람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그 뒤에 2번째로 한국인으로서 영웅행진을 할 수 있었던 인물은 1965년 5월 19일의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1954년 8월 3일자 뉴욕타임즈는 이 행사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뉴욕시는 어제 이승만 한국 대통령에게 영예와 찬사를 보냈다. 오찬과 명예박사학위를 기념하는 티커테이프 행진 축제 분위기가 79세의 한국 지도자이며,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국가간의 필연적인 충돌을 경고하는 그에게 베풀어진 것이다." 약 15만명의 뉴욕시민들은 한국의 지도자 이승만에게 마천루로부터 종이가루와 테이프를 뿌렸다.

27. 건국과 부흥의 과정에서도 식목일을 공식적으로 지정하는 등 산림녹화와 사방사업을 통해 친환경적인 정책을 펼침



- 1957년~1960년 사이의 국무회의록을 보면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산림녹화 구체방안이 제시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의사를 밝힌 마지막 국무회의 안건에도 산림녹화와 사방사업이 올라 있었다. 1957년 국무회의에서 쌀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산을 개간하겠다는 농림부 장관의 제안에 이 대통령이 질책을 했다.

큰 목소리로 농림장관을 꾸중하던 대통령은 "함부로 산을 훼손하면 안 된다. 산에 나무를 열심히 심고 강을 잘 정비해 우리 강산이 푸르러지면 후손들이 잘살게 될 것"이라며 대안으로 수확량이 많은 인디안 쌀 연구와 석탄 생산에 군 공병대 지원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현재까지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식목일을 공휴일로 처음 지정한 사람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다. 1949년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건'을 제정하면서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강산개조론을 주창했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산림녹화의 초석을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의 기틀이 잡히지도 않은 1950년 전에도, 피 흘리며 싸우던 한국전쟁기간 중에도 "나무를 심자"고 역설했다. 1949년 4월 식목일쯤에는 "애국애족 정신으로 나무를 애호하자"고 부르짖었다. "사람마다 적어도 여섯주씩 심고 하나도 베지 말기를 작정하며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나무를 보호하고 살리는 것을 직책으로 알어야 할 것입니다"라면서 말이다.

같은 시기 북한은 농지확충 명목으로 울창한 산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50년이 지나 전 국토가 황폐화된 북한은 가뭄과 홍수로 식량을 구걸하는 거지국가로 전락했다. 세계식량농업기구(FAO)와 환경운동가들은 일제 침략기 자연 파괴와 6·25 후 사회 혼란을 극복하고 산림을 푸르게 가꾼 한국의 성공을 개발도상국의 교본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산림 황폐화로 사막화가 우려되는 불량국가로 낙인 찍혀 반면교재로 이용되고 있다.

유엔사막화방지협약(UNCCD) 회의에서도 북한의 심각한 토지 황폐화와 가뭄, 몽골 중국의 사막화 대책이 거론됐다. FAO 통계에 따르면 산악국가인 북한의 산림이 매년 줄어들어 2010년 현재 국토면적의 47%뿐이다. 분단 후 북한 산림이 대폭 감소했다. 매년 서울 면적의 약 2배에 해당하는 산림이 훼손되어 국토의 5분의 1이 되는 거대한 산림이 최근 20년 만에 사라진 것이다.

산에 나무가 없어진 후 북한은 1980년부터 2010년까지 19회 대홍수를 비롯한 지진, 전염병, 태풍 등의 큰 자연재해가 매년 있었다. 식량 증산 욕심으로 산을 농지로 개간한 후 생긴 인재다. 김일성은 6·25전쟁을 일으켜 많은 인명을 살상한 데 이어 아름다운 산과 강도 파괴한 것이다. 이러한 이승만 대통령의 친환경적인 사업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바톤을 이어받는다.

28. 장면 내각과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토대가 된 이승만의 경제개발 3개년 계획



- 1957년을 전후하여 미국의 대외정책은 군사우선에서 경제중시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소련과 중국, 북한이 급속한 산업화에 성공함에 따라 그들이 제3세계 국가들에게 하나의 대안모델로서 부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미국은 경제적으로 우방국들에 대한 지원을 하고자 했고, 우리나라도 해당되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정세를 이승만 대통령은 꿰뚫고 재정안정계획과 장기경제개발계획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정부가 가급적 많은 부분을 국방비에 쓰기를 강력하게 권했으며, 그 결과 1954년부터 1960년 사이에 우리나라는 지출액의 34.8%를 국방비로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20%정도를 교육에 투자했던 것이다.

미국은 우리나라가 독립적으로 발전을 꾀하기보다 일본과 공조를 하면서 일본으로부터 많은 물자를 수입해서 쓰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과 교류를 하길 꺼려했고, 최우선과제를 경제안정이 아니라 경제재건과 부흥으로 삼았다. 원조재원을 사회기반설비와 생산재 산업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조속한 시일 내에 한국 경제를 재건하고 자립시키자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개발계획은 1953년 3월 전쟁 중에 발표된 UNKRA(국제연합한국부흥단)의 네이산 보고서(한국경제재건 5개년 계획)가 그 시작이다. 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 이승만 정부 관료들의 이의가 많았고, 또한 단지 지침서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장 시행되거나 하지는 못했다.

본격적으로 경제개발계획 안이 제기된 것은 1958년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하면서부터다. 이곳엔 EDI(세계은행 산하의 경제개발연구원)의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우수 인재들과 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신진기예들을 대거 기용했는데, 이중에선 현재 많은 나이에도 불구 효성그룹의 고문으로 재직하고 있는 송인상 씨가 유명하다.

송인상 씨는 EDI 연수를 다녀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부흥부장관 자리에 기용되는데, 그는 그러면서 후진 개발도상국에서는 정부 주도하의 강력한 경제개발계획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당시 마샬 플랜 입안자로 유명했던 미 국무부 차관인 크리스천 히터를 방문 설득하면서 미국 원조자금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할 것을 약속받아냈다.

미국과의 많은 우여곡절 끝에 1958년에 드디어 산업개발위원회를 설립하게 됨으로써 본격적인 계획경제개발의 시동을 걸게 된다. 다만, 초기에 큰 문제가 있었는데, 산업계획 모델을 작성하기 위해선 수많은 통계자료와 지식이 필요한데 당시에는 이런 자료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많은 조사를 필요로 했는데, 이 때문에 이승만 정부는 산업개발위원회 위원들에게 월급을 장관보다 4배를 더 주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해가며 각고의 노력을 기했으며, 이러한 조사는 1960년 초에 가서야 끝나게 된다. 수많은 노력이 있는 끝에 1960년 4월 15일에 드디어 처음으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안이 발표되고 의회를 통과하면서 경제개발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는데, 4일 뒤 바로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이승만 정권의 계획개발은 백지화되었는데, 다만 다행인 것은 당시 부흥부 관리들이 이후 정권에서도 이를 계속 추진해나갔다는 것이다. 참고로 3.15 부정선거 건으로 투옥한 송인상 씨는 1963년에 석방되어 한국경제개발협회장이란 요직을 맡게 된다. 경제개발계획은 이승만 정권 때 경제개발 3개년 계획안이 작성되어, 장면 정권에 의해 5개년 계획으로 수정되었다가, 군사 정권 이후엔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발전 계승되어 나간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의 업적은 이승만 정권이 여러 분야에서 기반을 잘 다져놓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수입대체공업화가 후일 박정희 정권의 수출주도 경제의 토대가 된 것은 분명하다.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불과 2개월 만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이승만 정부가 1년 8개월에 걸쳐 완성한 경제 개발 3개년 계획을 급히 수정한 것에 불과하였다. 6·25전쟁의 재난 속에서 국가 존립과 경제 부흥의 토대를 마련한 이승만의 공적은 마땅히 평가 받아야 한다.

즉, 해방 후 최초의 종합적인 장기 개발계획이라고 할 이 경제개발 3개년계획은 비록 당초 예정대로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으나, 곧 이어 등장하는 민주당정권에 의하여 일부 내용이 수정되어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또 1961년 5월 5.16쿠데타 후 군부정권에 의하여 다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수정되어 비로소 실천에 옮겨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경제개발 3개년계획은 한국의 경제성장사에 있어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9. 매년 평균 600명 이상을 1인당 6천 달러를 들여 인재들에게 국비유학을 보내서 기회를 주었고, 또1953년~1960년 기간에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으로 나간 유학생이 4,884명, 1953~1961년 기간에 해외로 떠난 단기연수 기술훈련생은 2,309명, 미국을 다녀온 군 장교와 하사관은 1만 명으로 이들 모두 나중에는 공업화와 근대화의 기수가 되어 기여



- 이승만은 AID의 기술원조계획을 이용하여 국내 대학과 해외 많은 대학을 연결하였는데, 특히 700만 달러를 들여 서울대와 미네소타대학 간에 협정을 맺게 하여 우리 학생이 외국에서 많은 것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우리나라 해외 박사 중 미네소타대학 출신이 가장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나중에 한국 과학기술계를 이끄는 중심축이 되었다.

이 밖에도 연세대, 고려대를 워싱턴대학과 협정을 체결하였고, 기술원조자금을 이용하여 수많은 대학교 시설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교육뿐만이 아니라, 각 기업과 산업체의 많은 기술자를 해외로 장기간 연수를 보내면서 외국의 발달한 기술력을 빨리 배워오도록 장려하였으며, 결국 이들이 고국에 돌아와 한국 산업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일례로, 당시 미국이 10만 kW급의 최신식 화력발전소를 한국과 파키스탄에 동시에 지어줬는데, 한국은 당안리 발전소 완공 이후 곧장 180명 기술력 있는 엔지니어를 투입하여 발전소를 운영한 반면에, 파키스탄은 훈련된 인력이 부족해 운영 인원을 1500명 가량 두었다고 한다.

이렇듯, 만약 이와 같은 이승만의 인재 육성 정책과 교육 정책이 없었다면, 이후에 대학 인력 부족 문제로 산업 근대화 과정에 큰 차질을 빚었을 것이다. 만약 이승만 시절에 교육 토대가 완성되지 못했다면 박정희 시절 그 찬란한 경제 성장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인재들을 양성하고 배출하는 데에 힘을 썼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그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했다.

30. 이승만이 스스로 하야해서 대통령직을 사임



- 1960년 4월 19일에, 그 전날에 있었던 4.18 고려대생 데모사건을 계기로 4.19혁명이 일어났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그 사건을 통해 이승만 정권은 끝이 났다. 그런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군권과 경찰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탄압을 하지 않고 하야를 선택했다.

최근에 있었던 리비아 사태나 시리아 사태, 전두환의 5.18사태와 같이 충분히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던가 측근들을 위해서 강력한 탄압을 충분히 가할 수도 있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시의 국방장관이었던 김정렬은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결코 당시에 하야 성명이 나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사실, 이후에 나온 문건들을 통해 드러난 것이었지만 이미 이승만 대통령은 4.19혁명이나 4.18 고려대생 데모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인 1960년 4월 12일에 이 사태, 즉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로 일어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책으로 자신이 하야하는 것을 언급하기도 했고, 실제로 측근들에게 숙고해보라고 하기도 했다.

김정렬 국방장관은 또 4.19혁명이 벌어진 당시에 이승만 대통령이 "불의를 보고도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회고했다. 최근에도 논란이 많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정권 말기에 부인인 프란체스카와 여러 자유당의 핵심인사들에 의해 정국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인의 장막에 갇혔었다는 주장이 문건들을 통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아무튼 이와 같은 면들을 면밀히 분석해서 봤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에 시위를 막기 위한 차원에서 군인들과 탱크까지 실제로 현장에 투입된 상황에서 끝까지 버티지 않고, 하야를 통해 평화적으로 대통령직이라는 절대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온 것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업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출처: http://cafe.naver.com/nazz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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