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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북좌파의 조상은 맑스가 아닌 친일파
김일성 가문의 신격화는 천황의 신격화
김종일 네티즌 논설가   |   2011-10-11
친북좌파의 조상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親日派’다

-대한민국 근대성과 反근대성의 기원- 

“우리는 공산당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산당의 매국주의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절실히 깨닫고 회심개과해서 우리와 같이 보조를 취하여 하루 빨리 평화적으로 남북을 통일, 정치와 경제상 모든 복리를 다 같이 누리게 되기를 부탁합니다. 만일 분열을 주장해서 남이 괴뢰가 되기를 감심할진대 결코 방임치 않을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 이현희, 233쪽에서 재인용)

1. 친북좌파는 친일(親日)을 심판할 수 있는 깨끗한 사람들인가? 

  우익진영은 ‘친북파’와 ‘친일파’를 나란히 놓고 본다. 정확히 말해서 대한민국 보수세력은 일본의 ‘대아시아주의’와 소련공산당의 ‘소비에트 코뮌’이 성격적으로 유사하다고 본다는 말이다. 그리고 소비에트 코뮌이 북한에 가서 ‘김일성연방제’가 됐으니, 일본의 ‘대아시아주의’와 북한의 연방제 책략이 비슷한 것이라는 논리가 가능하다. 사회주의자가 아닌 일반국민에게 ‘러시아’와 ‘일본’은 동일한 침략자(최문형, 27쪽)였다. 아시아 민족 국가들을 일본이 주도한다는 ‘대아시아주의’와 소련 인근 약소민족을 소련이 주도한다는 ‘소비에트 코뮌’은, ‘친일파’와 ‘공산주의자’가 아닌 정상적인 국민의 시각에는 ‘침략자 이데올로기’로 동일하다. 

  즉, 해방과 함께 이북에 주둔한 소련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군림해 가지가지의 만행으로 양민을 괴롭히고 공장이나 발전시설, 심지어 쌀까지 반출해 가서 일반국민들의 반감과 증오감을 사고 있었는데, 이 소련군의 앞잡이가 되어 제 세상을 만난 양 날뛰면서 세도를 부리는 급조공산당원에 대한 일반국민의 반감과 증오는 일층 더 큰 바 있었다. (사단법인 신의주 학생의거 기념회, 191쪽)

  필자가 신문광고로 ‘자본론’이 완역돼 출간됐다는 광고를 본 것은 1946년이었다. 그 이전 공산주의자들은 외국어를 통해서 공산사상을 습득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외국어 독자는 커녕 한글독자층도 넓지 못했다. 문맹이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로서 일정한 소양을 갖추고 소련 공산군 부대를 맞이했던 사람은 극소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미 80년대를 겪은 세대들은 90년대 이후에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대중화된 현실에 맞게,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미달(未達)된 선전선동으로 사회 데모를 이루는 상황을 체험했다. 고등학교 국정교과서 국민윤리는 주체사상식 품성론 비슷한 효과를 냈고, 홍콩 상업 암흑가 영화에서 ‘의리’ 문제가 80년대 운동권들에 사회주의적 공동체관점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요즘의 좌익 서적들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대중화 이전인 80년대 데모를 혁명 이론의 실현처럼 설명한다. 그렇게 보는 역사해석방법은 전체 좌파 데모 참여인구 10%를 확실하게 밑도는 극소수 정예 이론분자를 중심으로 나머지 전국민을 포기하는 시각이다.

해방공간의 좌익 사회운동 해설도 동일한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북 실향민이 북한 김일성 점령지에서 겪은 ‘급조공산당원’은 과연 공산주의 이론 학습을 단 한 차례라도 받았던 사람들인가? 아니면 그들의 생활 체험 내에서 북한공산당을 환영하며 공산당 지령에 맞춰 행동할 ‘대체 학습과정’이 존재했던 상황일까? 대동아공영권에 깊숙이 빠진 이들이라면 ‘반파시즘연합전선’이란 코민테른 지령은 배우지 않아도 이해되는 것 아니었을까? 

  이 글은 해방공간에 있어서 ‘급조공산당원’(공산주의 이론 정예분자를 제외한)의 지식사회학적 기원을 찾는 시도다. 일본 제국주의 말기의 ‘친일권력’을 위한 교육기제가 곧 소련군의 북한 공산화 때 인력 육성 학교 역할이 됐기 때문에, 필자는 급조공산당이 가능했다고 주장하려 한다. 친북좌파와 친일파를 지식사회학적으로 비교 분석하기 위해서는, ‘친러파’와 ‘친일파’를 나란히 놓고 바라보아야 한다. 

2. 구한말의 세 가지 외세 이야기 

  일본은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청나라는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에, 러시아는 3국간섭, 아관파천, 용암포 점령, 러일전쟁으로 망해가는 조선왕조에 개입한다. 그만큼 조선왕조 내재적인 역량은 한계가 뚜렷했다. 

  불행하게도 조선정부는 러시아의 진출이나 일본의 영향력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조선정부는 실제로 사용할만한 육군이나 해군도 없으며, 한 나라가 스스로를 위해 목소리를 높일 수 없을 때 처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단지 몇 천명 뿐인 육군은 지난 몇 년 동안 유럽식 무기사용을 훈련 받아왔다. 그들은 그라스, (단종된 패턴)의 무라타, 마르티니, 그리고 다양한 총구장전식의 활강 총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들의 사격 능력은 부실하기 짝이 없으며 게다가 용기와 훈련도 부족하다. 포병은 없고 기병대는 승마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으며 무기와 임무에 대해 무식한 몇 백명의 남자로 한정되어 있다. 위기 상황에서는 기병과 보병 모두 철저하게 사기가 꺾일 것이다.(앵거스 해밀튼, 36~37쪽)

  조선왕조는 중국을 향해서 조공을 바치던 국가였다. 그러던 중국이 아편전쟁을 통해 서구열강에 패배하게 된다. 실학파들은 이러한 사정을 알고서 국가의 운명을 걱정한다. 

  그러던 한국을 개항시킨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19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고, 강화도에 군대를 보내어 수교를 요구했다. 대원군이 실각한 이후 조선왕조는 협상에 응하여 1876년 2월에 조일수호조규라 불리는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을 먼저 개항시킨 미국과 조선왕조는 1882년에 조미통상수호조약을 맺는다. 
 
2.1. 청나라 이야기 

청나라는 조선에서 쉽게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임오군란으로 군부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집권세력인 민황후는 시골로 피신했고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차지하게 됐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을 회복한다. 조공체계의 지속을 통해 조선왕조에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고 싶었던 청나라의 내면세계는 황준헌의 「조선책략」에서 드러난다. 

  러시아는 다른 나라를 희생하면서까지 무한한 팽창 정책을 추구하고 있고 영토에 대한 야욕으로 들떠 있기 때문에 조선은 심각한 위험에 빠져 있다. 그 반면에 중국은 조선과는 천연적 동맹국이며 우방인 동시에 인력으로나 금전적으로 언제든지 조선을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는 나라다. 두 나라는 서로가 필요하며, 그들의 동맹관계는 순치(脣齒)지간처럼 밀접해야 한다. (W.E.그리피스, 549쪽) 

중국은 조선왕조를 위한 마음 좋은 ‘키다리 아저씨’ 역할이 아니었다. 동아시아를 오랫동안 지배한 제국주의 국가로서 자존심이 그렇게 드러났을 뿐이다. 조선왕조는 몰락해가는 동아시아 패권국 청나라에만 의존할 수 없었다. ‘한러수호조약’은 ‘조선책략’으로 상징되는 중국중심 문명을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중국이 바라보는 구한말은 조공국이자 속국인 조선왕조를 일본에 빼앗겼다는 측면으로 기록된다. 

초중 역사교과서에서는 청일전쟁 전후 조선과 청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조선이 청의 오랜 속국이라는 점을 기술하고 있으며, 조선이 청의 속국임에도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화여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고 기술하여 조선에 대한 실책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박정현, 56쪽) 

  19세기는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상품시장을 찾아서 동아시아를 향해 몰려온 때이다. 많은 인구를 보유한 중국을 향한 서방 열강의 공격은 많았다. “열강의 침략을 막고 영토를 보호하는 것이 청의 주변 외교의 주요한 임무의 하나가 된다. 조선 반도에서의 청의 정책은 북으로는 러시아 세력의 확장을 경계하고 동으로는 일본을 견제하며 남으로는 영국과 프랑스의 세력을 견제하고, 멀리 미국의 세력도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외교구도”(이용식, 3쪽)였다. 

  그러나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은 점차 축소돼 갔다. 미국과 수교를 하며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고종의 편지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조선왕조는 중국 지배의 동아시아 체제를 넘어서서 국제적인 질서로 인정 받고자 했다.

  조선의 국왕은 이에 국서를 보냅니다. 예로부터 조선은 중국에게 조공을 바친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조선의 국왕은 국내외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조선과 미국은 이제 상호 동의에 따라 조약을 맺으면서 평등을 기초로 하여 상대국을 대우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국왕은 분명히 공언하건대, 과인은 국제법에 따라 본 조약을 체결함에 있어서 신의로써 자신의 주권을 완전히 수행할 것입니다. 청국에 대한 조공국가로서의 조선에 부과된 의무에 관해서 미국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약을 교섭케 하기 위해 사신을 임면한 지금으로서 이와 같은 예비 선언을 해 두는 것도 짐의 의무로 여겨지는 바입니다.

1882년 5월 15일
미국 대통령 각하
(O.N데니, 30쪽) 

2.2. 러시아 이야기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주류 세력은 ‘기독교세력’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세력은 반일반공의 경향이 강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뉴라이트는 기독교세력이 주축이 된 전통적 한국현대사에 기록된 ‘반일반공’을 ‘친일반공’으로 수정하였다. “일본이 한국에 근대성을 가져다 주었고 그것이 긍정적인 기능을 했다”는 고 주장하여 사회주의 항일운동 이데올로기의 공격받기 좋게 수정한 것이다. 개악(改惡)이다. 그러나 ‘친일반공’보다 더 동의 받기 어려운 것은 ‘친일파’를 국민의 시점에서 비판하지 않고, ‘친러파’ 입장에서 비판하는 입장이다. ‘친일파’와 ‘친러파’는 동일하게 침략자에 종속된 집단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현대사에서 경쟁하는 침략자 관계요, 어느 한쪽을 낭만적으로 바라보게 되면 역사해석을 진실하게 할 수 없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나라가 러시아에 합방되었더라면 러시아는 결코 대한제국을 일본제국주의(이하 일제)가 한 것 같은 황국신민관이라는 모멸적인 제도를 만들어 야만적이고 비인도적 지배는 하지 않았을 것은 확실하다. (중략) 러시아가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있었던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러시아는 결코 일본이 대한민국을 병탄하는 일 같은 동일한 형태의 병탄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고경자, 45~46쪽)

일본을 개항시킨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일본 입장을 대변하였다. 한미수호조약을 믿은 조상들은 미국의 배반으로 식민지가 됐다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미국은 해방공간 까지 한반도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미국이 일본의 조선 병탄을 방조함으로 세계 다른 나라들도 미국과 비슷한 태도를 취하게 했다.(H.N 알렌, 197쪽)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 독립운동을 통해서 미국의 배반이 한민족을 일제 식민지에 빠지게 했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기도 하였다. 

  미국은 1898년 이래로 만주에 야심을 가지고 있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진작부터 일본의 힘을 북돋아주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일본을 통해 만주 시장에 참여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 전쟁을 도발하자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일본의 조선지배를 찬성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전쟁비용도 대 주었다.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미국은 일본과의 ‘태프트-가쓰라 회견’(1905년 7월 29일)에서 미국은 일본의 조선보호권 확립에 찬성한다는 정책을 재천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을사조약 체결로 조선이 외교권을 상실하자 미국은 어느 열강들보다 가장 먼저 공사관을 철수했다.

이처럼 미국은 철저히 자신의 국익에 따라 조선문제에 접근했고, 결국 일본의 조선합방을 승인해주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김윤희․이욱․홍준화, 302쪽)

결국, 구한말 한반도는 ‘친청’ ‘친일’ ‘친러’ 세력이 각축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구한말 선교사들의 증언을 종합해볼 때 최소한 ‘일본’과 ‘러시아’는 러일전쟁이 있기 전까지 동일하게 조선왕조를 점령하길 꿈꿨다는 점이 드러났다. 다만 러시아는 직접적 관심이 만주에 있었고, 일본의 직접적 관심이 한반도에 있었던 차이는 있었다. 

  아시아에 있어서의 러시아의 전통적인 정책을 잘 살펴보면 조선에서 러시아가 이제까지 취한 태도의 속셈을 잘 알 수 있다. 토착민족을 점차로 포섭한다는 러시아의 정책은 그들이 완전히 자기의 지배하에 예속될 때까지는 그들을 문명화시키거나 강대화시킨다는 의미가 정책 그 자체내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그와 같은 과정이 완전히 달성될 때까지 그 토착민족이 분열되기를 꾸준히 기다리거나 아니면 그와 같은 분열을 적극적으로 조장한다. 러시아는 이제까지 장차 개방될 방대한 시장을 획득함으로써 이익을 얻기 위해 그 시장의 주인이 되고 있는 민족을 강화시켜준 사례는 역사상 한번도 없다.(221쪽)

북쪽이 러시아의 활동 무대가 되자, 반도의 남쪽은 일본의 영향권이며 북쪽은 러시아의 영향권이라는 관념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인들 사이에 풍문이 떠돌자 당시의 사태를 적중하는 예언을 찾기 위해 고서를 샅샅이 뒤졌다. 대체로 한인들의 태도는 러시아와 일본의 사이처럼 항상 합리적이고 일관성이 있는 것이었다. 한인들은 러시아와 일본이 점차로 가까이 접근해 왔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으나 심중으로는 러시아인을 경계하는 묘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한인들은 이곳에서 자기들의 세력을 형성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겠지만 ‘양국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기원한다’고 항상 말하고 있다.(223쪽)

서울에서 작용하고 있는 러시아의 영향력은 너무나 컸다. (224쪽)

서울에 있는 러시아의 신민들은 조선에서 가장 부패한 관리를 이용했으며 그들을 통해 사사건건 일본의 이익을 봉쇄했다. 더 나아가서는 조선의 각 항구의 배타적인 권리를 요구했으며 용암포 사건을 통해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는 데 성공했다. 분명히 그들의 정책은 음험한 수단을 써서 반도로부터 일본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대신 들어앉으려는 것이었으며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러시아의 지도에 조선을 흡수시키려는 것이었다는 점은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든지 알아차릴 수가 있다. 그러므로 전쟁의 원인은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행위를 저지함으로써 자신의 치명적인 이익, 아니 자신의 존립 그 자체를 보호하기 위한 일본의 필요에서 연유된 것이다.(230~231쪽) (H.B 헐버트) 

  헐버트에게 러시아는 일본과 동일한 의미에서 조선왕조를 식민화하려는 제국주의 세력이다. 이는 그가 바라본 당시의 조상들의 시각과도 일치했다.

  한인들 중 대부분은 러시아가 승전한 것보다는 일본이 승전한 것을 다행하게 생각했다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지만, 100사람 중에 99사람은 조선이 그 양극을 질타하기를 바랐던 바 이는 그들의 악의없는 소망인 것이다.(H.B헐버트, 245쪽) 

  구한말 선교사 중에서는 러시아가 북한 영토를 식민화할 것이라 본 사람도 있다. 비록 러시아는 당시의 행정에 간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요동반도를 제외한 만주지방을 사실상 점령했다. 러시아의 세력은 누구도 막을 수 없을만큼 강력하게 한국에 진출하고 있었으며, 적어도 북한지방이 러시아 영토화하는 것은 오직 시간 문제였다. (F.A. 매켄지, 105쪽) 

  이는 사실에 부합되는 것으로 러시아가 한반도를 가장 먼저 분할 점령하겠다는 의도를 표현한 바 있었다. 한반도를 분할하여 북한 지역을 점령하고 싶었던 것은 러시아의 오랜 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파블로프 러시아 공사는 하야시에게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의 범위를 나눠 그 범위 안에서 질서 보전의 책임을 담당하자고 제의했다. 이러한 그의 제의는 한국 남부지방은 일본군이, 북부지방은 러시아군이 주둔하자는 것으로 로마노프-아마가타 의정서의 비밀조항을 근거로 한국을 분할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광호, 133쪽)

  고종황제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에 살해당하게 되자, 일본의 테러리즘으로부터의 보호를 러시아 외교관에게 필사적으로 요청했다.(I.B 비숍, 11쪽) 아울러 러시아에 의존해서 조선의 운명을 고쳐 보려는 생각도 하게 됐다. 그러나 왕조 내부의 주체적 역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일본 못지 않은 제국주의 야욕을 가진 세력에 의존한 한계는 뚜렷했다. 
 
2.3. 일본 이야기 : ‘대아시아주의’와 '통일전선전술‘의 공통점 

  청나라 지배력이 와해된 구한말 한반도는 ‘러시아’와 ‘일본’의 지배력이 팽팽하게 맞서게 됐다. 청나라는 자체적으로 서구 열강에 무너지기도 했지만, ‘청일 전쟁’을 통해서 한반도 영향력이 결정적으로 붕괴하게 되었다.

러시아도 ‘동아시아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 한반도를 노렸고, 일본의 욕망도 사실상 동일했다.(버라토시 벌로그 베네대크, 초머 모세 역저, 152쪽)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통해서 고종은 신변에 커다란 위협을 느끼게 됐다. 그럴수록 고종황제는 러시아에 의지하려 했다. 고종황제가 러시아에 의지할수록 일본 제국주의는 속이 바싹타들어 갔다. 한반도를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맞섰던 것은 ‘러일전쟁’을 야기하게 했다. 
 
필자가 주목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왕조 침략 요소는 ‘급조 공산당’의 대체 학습으로서 친일문화 기제 존재다.

일본 낭인 '천우협‘은 동학농민전쟁 때 농민군에 개입한다. 이는 ’국민당 간판‘을 달고 공산당 활동을 했던 ’1차 국공합작‘에 해당되는 통일전선 요소를 담고 있는 것이다. 천우협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동학농민군과 제휴한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학계에서 유교적인 충군애국사상에 기반됐다고 평가된다.(유영익) 동학농민군과 일본 낭인 천우협은 같은 가치관이 아니다. 동학농민군은 중세 질서를 사수하려는 입장이고, 천우협은 일본 민족주의를 극대화하려는 입장이다. 천우협은 ’동학농민군‘을 통해서 ‘친청파’ 민씨 정권을 무너뜨려 동학당 정부를 수립하고, 천우협이 참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강창일, 100쪽) 

  ‘조선문제’의 모든 책임은 민씨정권에 있고, 그 정권이 타도되지 않는 한 조선의 진보 개화는 당분간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바로 조선 존망의 위기, 더 나아가 동양의 위기가 닥칠 것이다. 그래서 동문동조와 순치보거 관계에 있는 일본이 “조선의 일대혁명”을 통해 조선민족을 구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지키는 것은 “일본의 책무이며 사명”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혁명이란 민씨정권 타도이고 이것을 통해 내정을 도모하고 조선으로부터 청을 배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도 그 대상이 러시아로 바뀌었을 뿐, 똑같이 전개 되었다. (강창일, 335쪽) 

  표로 만들어 보면 일본의 ‘대아시아주의’가 북한 연방제 통일전선전술과 얼마나 흡사한 논리구조를 띄고 있는지가 보일 것으로 보인다. 대아시아주의로 엮인 지역은 고대로 소급하면 혈통으로 같다. 그런 전제이면 아시아적 공동체주의가 가능하다. 이는 북한 연방제의 모델인 소비에트 코뮌의 공동체주의와 유사한 것이다. 


 


구한말


대한민국 현대사


타도대상


민씨정권


전두환~이명박정부


추방․배척 대상


청나라, 러시아


미국


연합대상


일본인 +친일파


북한공산당 +친북좌파


그런가 하면 ‘대동아공영권’ 논리는 한국 현대사 속에 급진좌경 이데올로기인 ‘민족해방’이념과 구조적으로 대단히 흡사하다.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일본이 아시아민족을 구출한다는 것은,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소련 공산당(혹은 혁명 수출국)이 사회주의 약소민족을 구출한다는 논리와 교묘하게 겹쳐진다. 

대동아공영권은 전쟁 전후 동북아시아 기존의 일본 영향권 하에서 시작하여 동남아시아 각지역에까지 일본의 세력권 하에 두고 이를 모든 측면에서 일본이 지도하는 지역체제로 재편하려는 구상이다. 일본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탄압에서 아시아 민족들을 구출해 낸다는 논리로 무장하여 동남아시아에 진격하여 각 지역을 영향권으로 만들었다. (안상은, 1쪽) 


 


대동아공영권


민족해방사상


추진 주체


일본


혁명 지원국 공산당(소련)


구출 대상


아시아인


사회주의 민족(공산주의자)


누구로부터?


서구 열강 제국주의로부터


대한민국 국민은 조선왕조를 병탄한 일본을 ‘제국주의’로 부른다. ‘대아시아주의’ 및 대동아공영권은 분명히 침략자의 이데올로기다. 물론, 전쟁 동원 기제 내부에 있어서는 어떤 공동체의식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대한민국 국민에겐 중요하지 않고 일본 극우파에게만 중요한 일이다. 
 
3. 일본제국주의와 동일하게 침략적이었던 민족해방 이데올로기 

  마찬가지로 북한공산당의 연방제 통일전선전술에 기초된 민족해방사상도 일제의 ‘대동아공영권’과 똑같은 침략자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 보아야 타당하다. 

  그러나 그 때 붉은 기를 앞세우고 나타난 해방군이라고 하는 이리 떼와 그들에게 놀아나는 꼭두각시들의 모진행패에 우리의 푸른 꿈은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중략) 그들은 우리를 일제로부터 해방시켜 준 은인이니까요, 하지만 기다리는 데에는 한도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횡포는 날이 갈 수록 더해갔고 이제는 학교에까지 그들의 마수를 뻗쳤습니다. 단군 이래 반만년 동안 면면히 흐르며 발달해 온 우리 배달민족의 맥을 끊고 그들 공산당식, 바꿔 말해 빨갱이 사상을 주입시켜 신판 적색 제국주의 식민지로 만들 작정으로 학원안에 그들 수하의 졸개를 심어놓고 학우 서로 간의 눈치를 살피게 하고 조그마한 이상한 낌새라도 알아차리면 바로 보고되며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가 온갖 악행을 가했습니다. (사단법인 신의주 학생의거 기념사업회, 축간사 조상화 신의주 제1공업학교 동문회장)

  일본이 침략 야욕을 노골화하기 이전에 ‘일본’은 「먼저 근대화된 나라」일 뿐이다. “1884년 시절의 ‘친일’을 죄악시할 이유가 있느냐 하는 문제도 있다. 그보다 20년 후 침략자로서 일본의 태도가 확정된 이후의 친일은 그 자체로 반민족과 반역의 의미를 지닌다.”(김기협, 172쪽) 1904년 이후의 ‘친일’과 1884년 무렵의 ‘친일’은 결과적으로 분명히 다르다. 민족의 삶을 수렁에 빠뜨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단계 부터가 진정한 의미의 ‘반민족 행위’로서의 ‘친일’이다. 러시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정체성의 기원인 ‘대한제국’의 지도자 고종황제부터가 ‘친러’적이었다. 일본이 명성황후 조차 잔인하게 시해하는 상황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을 경쟁시켜서 그 사이에서, 국가 안보를 유지하겠다는 주장은 나무랄 수 없다. 러시아는 항일독립운동에 공작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것이 러시아민족이 일본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도구적 술책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알 수 없었던) 상황이기에 뭐라 나무랄 수 없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1945년 이전에 사회주의자와 연합관계를 실제로 이룬 바도 있다. 그것이 사회주의를 동의해서 이룬 것이 아니라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된 ‘기독교 독립운동’ 차원이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러시아가 약소 민족을 후원하는 ‘키다리 아저씨’가 아니라 일본과 유사한 침략자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은, 1945년 이후에 김일성을 앞세운 소련의 북한점령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일반 시민들은 조선의용군이 공산당의 무력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독립군으로만 알고 있었다.(중략)

조선의용군이 신의주 시가를 누비면서 보무 당당히 시가 행진을 벌였을 때 그들은 공산군이라는 말을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오로지 자기들은 이억만리 중국 땅에서 독립을 위하여 외놈과 생명을 걸고 용감히 싸운 민족의 무력이라고 자랑찬 소개를 들려 주었다. 이제 그 같은 독립군을 소련군 사령부가 괴뢰 공산도당을 앞세워 무장해제를 하고 만주땅으로 추방했으니, 그렇지 않아도 민심이 흉흉했던 무렵에 일이니만치 이 사건은 반소․반공의 악감정을 격발시키고 말았다. (사단법인 신의주 학생의거 기념사업회, 90~91쪽) 

  통일전선전술에 엮여진 주체가 통일전선전술에 엮였다는 자의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80년대 학생운동에 참여한 대다수가 공산이론 학습 없이 인간적 감정에서 참여했다는 사실과 비슷하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청나라가 붕괴된 이후에 ‘중화’를 찾는 핏줄에 흐르는 ‘선비후손’ 감정은 전위공산당의 ‘관료주의’에서 생산적인 일(小人의 소관업무)을 하지 않는 선비를 보았기 때문이다. 유교적인 충군애국(忠君愛國) 관념에 아시아적인 공동체 관념이 덧씌워진 그런 이해가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마르크스 엥겔스를 읽고, 그 변형으로 레닌을 읽고, 레닌을 조잡화시킨 스탈린을 읽고 그런 차원에서 코민테른 지령을 읽고, 그랬던 사람은 만 명의 한 명 꼴도 되지 않았다. 그것이 가능했던 ‘식자층’에게서도 공산주의 혁명을 ‘성리학’적 관념론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밖에 없기도 했다.

강만길은 20세기 현대사를 좌우합작 통일전선전술의 역사로 바라보며, 인용문에서 주어진 ‘조선의용군’이 통일전선전술임을 알고 참여했으며, 많은 민족구성원도 그것을 알며 지지한 것처럼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87년 6월 항쟁 주체가 문익환 목사의 89년 불법방북을 지지했던 것처럼 주장한다. 역사가는 발언권이 없는 민중들이 분통 터지게,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북한 김일성 점령 과정은 ‘러시아’의 침략적 본질을 알았을 때와 몰랐을 때의 기준선이 된다. 소련군의 북한 점령 이전에 독립운동에는 ‘친러’적인 사회주의와 연합관계가 당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공산당의 침략적 본질이 드러난 이후에는 일본 제국주의와 동일한 색깔을 갖게 됐다.

‘반일반공’ 이데올로기의 탄생이었다.

친북좌파 이데올로기에 동의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북한공산독재의 본질을 일본 제국주의의 반민족적 본성의 계승화로 본다. 많은 이들은 북한의 연호에서 일본 천황제 연호를 읽으며, 북한 김일성 가문 신격화를 보면서 천황의 신격화를 본다. 혁명세력과 反혁명세력을 나눠서 요덕수용소 등 정치범 수용소를 만드는 북한의 통치방법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항일독립세력 극단세력을 분리해서 인권을 짓밟는 고문을 하는 통치를 읽는다.

(대다수의 애국보수 세력은 6.15에서 이승만대통령이 소련 연방주의에서 읽은 매국적 기질을 읽는다. 민족 동질성 이란 이름하에 대한민국 교육을 등한시하고 북한 사회주의 문명 가깝게 유도하는 것과, 대한민국 국가정체성을 상징하는 태극기를 덜 쓰며 다른 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역대 러시아와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했던 일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 애국보수 세력이 공산주의자들의 약자 보호 관점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친북좌익 노선의 매국적 기질을 싫어하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도 결국은 매국적 기질을 위한 기초 작업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2003년에 ‘창사랑’ 사이트에서 ‘친일’과 ‘친북’의 연관성 글을 필자가 올렸고, 보수 우익 논객 몇 명이 그 논리를 사용하여 좌익인사 모 씨를 야유했는데, 좌익인사 모 씨에 의해 명예훼손 고발당했고 유죄판결 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소한 벌금형으로 끝난 것이라 하더라도 공산주의의 일본제국주의와 다를 바 없었던 침략적 본성과, 그 침략적 본성을 계승하는 친북좌파 문제는 재론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색깔론 운운하며 보수세력이 선량한 사람을 못살게 한다는듯한 이미지로 왜곡되는 여론이 아니라, 제2의 ‘한일병합’같은 국망이 나오지 않도록 만민공동회 같은 ‘알권리’중시되는 민주사회적인 토론정신의 회복이 드러나야 한다.)

일본과 러시아가 동일하게 침략적이었고, 중국은 조선왕조를 노예부리 듯하는 체제를 유지하고 싶었다. 미국은 한반도에 별 관심이 없었다. 

4. ‘개화’정신과 한국적 근대 계몽주의의 탄생 

  보수 역사학의 구한말 시대구분 명칭에 반드시 기록되는 ‘개화’라는 표현은 ‘개물성무 화민성속’(開物成務 化民成俗)의 약자다. ‘개물성무’와 ‘화민성속’은 모두 왕 또는 성인이라는 통치자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지식의 확장과 민중에 대한 교화의 의미를 띠고 있었다.

‘개물성무’는 이상적인 군주의 통치를 위해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오랑캐 청나라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본받을 만한 것, 즉 중화라고 할만하다면 통치에 도움 되는 새로운 기술을 ‘개물성무’라는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개물성무 화민성속’은 이념적으로는 성인의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왕의 정책을 의미하는 것이다. 국민 각자가 ‘왕’으로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깨달음이 ‘개화정신’의 실체였다.

그 개화는 강대국 질서에 편입되며 전통질서를 부정하는 자기 부정 논리로서 아니다. 세계 자유민주 세계와 함께 하는 가운데 ‘입헌군주제’를 통해서 전통질서도 보존하는 차원을 말한다. 계몽은 자기의 이성을 보호자 없이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정신을 ‘조공국’같은 보호자 없이 세계 질서에 참여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국 근대 계몽주의의 본질일 것이다. 대한민국이 U.N.으로부터 한반도의 단 하나의 합법(legal, 북한은 illegal) 정부로 인정 받게 되는 순간은 구한 말 이래 50여 년 지체돼 온 근대성의 실현이었다. 

  청일전쟁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독립신문」은 면밀히 살펴보면 독립협회 단계의 문명개화의 주된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문명화의 달성을 통한 독립상태의 유지와 입헌정치 체제의 도입을 통한 근대국가로의 모색이었다. 물론 독립협회 운동의 최대의 고나심사는 입헌정치운동으로 보아야 하며, 이들이 추구했던 독립은 ‘특정 외세에 의해 내정 문제에 자주권을 잃지 않는 상태’로서 주로 중화주의적 질서로부터의 이탈과 만국공법적 질서에 대등하게 참여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독립협회 세력의 독립은 일차적으로는 속방체제 문제로 불거지기도 했던 전통적 중화주의 체제로부터의 이탈이며, 새로운 질서란 세계 열국과 대등한 대우를 받고 국제질서에 편입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백동현, 42쪽)

  헌법 9조(“제9조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는 한국 근대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바탕을 본다. 많은 이들은 근대성을 서구화와 동일시하고 전통을 부정하는 것을 ‘근대성’의 본질로 본다.

헌법 전문에 기록된 ‘만국공법 질서에 주체적으로 참여한다’는 내용을 담은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란 구절과 헌법 9조의 연관성은, 대한민국 헌법이 생각하는 근대성의 본질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사람이 오만하게 세계를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민족의 삶을 국가는 뜻을 대변하여 발전시킨다는 한국 근대 계몽주의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밀접해 보인다. 

  나는 조선을 미국화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나는 조선이 단지 그들이 불필요한 분쟁에 휩싸이지 않을 정도로 서구문물에 친숙해 짐으로써 가능한 한 토착문화를 지키기를 바랐다. (W.F 샌즈, 129쪽) 

  청교도적인 미국 기독교 선교사들도 미국 국익에 봉사하는 인본주의적인 제국주의 첨병으로 온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복음’능력에 의한 사람 거듭나는 그런 속에서의 식민지 조선의 문명 변화를 바란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데, 이들 한국인들은 그들의 불만과 슬픈 감정을 폭발시키기 위해 기독교라고 하는 가면을 쓰고 오늘날과 같은 소요를 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인 선교사들은 아직 문화 수준이 높지도 않은 한국인들에게 서구의 진보적인 사상을 아무런 수정도 가하지 않은 채로 도입시킨 사실과, 이번 소요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 순진해야 할 여학생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해도 무방하리라고 믿는다.(C.W 켄달, 65쪽) 

  위 인용문은 고마쓰 미도루가 「재팬 애드버타이저」에 1919년 3월 5일에 실린 글을 한 미국인 선교사가 인용한 글이다. 일본 제국주의 안에서 조선왕조가 멸망한 상황에서 마음 부지할 곳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느낀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아울러, 기독교 신앙이 ‘생명 중시’의 신앙이기에 기독교 신앙으로 전 세계 기독교인과 하나가 될 때,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부당한 생명경시의 탄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기대감도 형성됐던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그 뜻을 구하는’ 그러한 기독교 세계관 실천은 ‘조선물산장려운동’과 농촌 계몽운동, 절제운동 등으로 나아갔다.

글을 마무리 한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미국 헤게모니가 흔들리고 있다. 러시아는 극적으로 권세를 회복하고 있고, 중국은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다. 일본은 무너질 듯 무너질 듯 하면서도 세계적인 힘을 유지하고 있다. 서구 선진 사회가 과도한 부채로 ‘절제’ 없는 인본주의 신앙으로 흔들리고 있다.

한국 국민에게 ‘자기 부정’ 의미로서 세계화로서 각 나라 추종자들이 유혹할 것이다. 과거 전통 다 버리고, 중국에 붙게나, 과거 전통 다 버리고 일본에 붙게나, 과거 전통 다 버리고 러시아에 붙게나, 이런 연장선에서 과거 전통 다 버리고 미국에 붙게나. 어느 하나도 정답이 될 수 없다.

진정한 정답은 “대한민국주의”안에 놓여 있다. 기독교 중심의 개화인사가 주축이 된 ‘독립협회’와 ‘고종황제’가 주축이 된 ‘대한제국’정신은 3.1 운동으로 복원돼 임시정부를 만들게 됐다. ‘친일’ ‘친러’ ‘친중’ 등 제국주의 침략적 본성에 치우친 이들에 영합했던 이들은 쉽게 몰락하거나 민족에 해악을 끼쳤고, 자국 이익에 충실한 미국도 대한민국 국민에 그렇게 이롭지 못했다. 

  이 혼란한 정치적 현상을 간단히 알기 쉽게 보도해야 했던 외인 기자들은 공산주의자는 ‘좌익’, 반공주의자는 ‘우익’, 연립내각을 바라는 자는 ‘중간파’라고 이름을 붙였다. 구미의 신문독자들은 김규식과 여운형을 수반으로 하는 중간파 노선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를 비난하고 그들과 타협을 거부하였으므로 ‘극우파’라고 제쳐 놓았다.(이현희, 181쪽) 

‘중간파’(‘중도파’)란 이름의 지적 재산권자는 외국인 기자들인데, 한국 정치상황을 잘못 봐도 대단히 잘못 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외국인 기자들에 유도되는 서구 열강의 흐름은 민족의 이익과 유사하지 않았다. 어떻게 흘러가도 상관없되 각국의 이익에만 충실한 입장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 국가에 가깝게 위치하며 대한민국 전통의 모든 것을 버려야만 ‘개화’이며 ‘개혁’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옳을 수가 없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은 21세기 한국의 현실이 구한말과 닮았다면,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은 ‘기독교 독립운동’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미래를 본다면, 이러한 공부길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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