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제주4.3사건과 남로당: 오르그와 프락치
제주도 인민해방군의 목소리를 그대로 흉내내는 4.3위원회
비바람 시스템클럽 회원논객   |   2009-04-03
좌익정권 치세 기간에 많은 것들이 진실이 바뀌고 역사가 뒤집어졌다, 그것은 선과 악이 바꿨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이하 4.3위원회)'라는 긴 이름을 가진 위원회에서 2003년에 편찬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이하 진상보고서)에서도 역시나 역사를 뒤집으려는 좌익정권 위원회의 왜곡과 은폐가 가득하다,

4.3에는 복잡하고 다양한 배경과 원인들이 들어있다, 그 복잡다단한 요인들 중에서 4.3위원회는 자기 입맛에 맞는 요건들을 취사선택하여 편향되고 좌경적인 진상보고서를 만들어 내었다, 진상보고서가 아니라 왜곡보고서이고 은폐보고서였다, 그 중에서도 이 보고서를 가장 혐오스럽게 하는 것은 4.3의 주범인 남로당에 대하여 면죄부를 팔아준 것이었다,

보고서는 남로당 중앙당이 제주도 무장투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으며 4.3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주장하고 있다, 보고서를 읽노라면 흡사 남한의 좌익들이 6.25가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보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소리가 당장이라도 책에서 튀어나올 듯 싶다,

6.25를 이야기할 때 김일성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듯이 제주4.3사건을 이야기할 때 남로당을 빼고서는 4.3을 이야기할 수 없다, 이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진실이었고 한글만 깨쳐도 알수 있는 역사였다, 그러나 4.3위원회는 이것을 뒤집었다, 좌경화된 여타 다른 위원회들이 진실을 바꾸고 역사를 바꿨듯이 4.3위원회도 좌익정권의 충견이었다,

4.3위원회가 남로당 지령설을 부인하는 근거는 남로당 지령을 증명할 '문서'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남로당 지령설을 부인하는 학자들과 군 출신 인사들의 저서를 여러개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세간에는 남로당 주범을 주장하는 저서들과 발언들이 즐비하다, 이런 것에는 일체 언급이 없었다, 4.3위원회는 왼쪽만을 쳐다보며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고르는 외눈박이였다,

진상보고서에는 박갑동의 저서 '박헌영'을 인용하며 이것 역시도 남로당 지령설 부인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던 중 중앙당의 폭동지령이 떨어졌다. 아마도 그 지령은 3월 중순쯤에 현지의 무장행동대 김달삼에게 시달된 것으로 안다. ...4월 3일 상오 2시. 문상길이 부대 장병들을 속여 완전 무장시킨 뒤, 3대의 트럭으로 제주경찰감찰청과 제주경찰서를 기습, 점령하는 것을 신호로 도내 14개 서를 모조리 습격했다. ...당시 중앙당에는 이 사건이 터질 무렵 당 군사부 책임자 이중업과 군내의 프락치 책임자 이재복 등을 현지에 파견하여 소위 현지 집중지도로써 군사활동의 확대를 기도했다. 또 폭동의 두목 김달삼의 장인이며 중앙선전부장 강문석을 정책 및 조직지도 책임자로 선정하여 현지로 보냈었다.

이 글은 박갑동이가 1973년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글'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다가 1983년에 출간된 '박헌영'의 일부로 진상보고서에 인용되고 있다, 박갑동은 남로당 지하총책을 지냈던 인물로 1950년에 월북했다가 박헌영이가 숙청되자 일본으로 도망가 후세에 남길 증언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4.3위원회가 이 글을 인용하며 남로당 지령설을 부인하는 근거로, 박갑동의 책에 저술된 이 사건들이 '실증적으로 입증된 것이 없다'는 이유와 박갑동이가 "내 글을 신문에 연재할 때 외부에서 다 고쳐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발언을 들고 있다, 그러나 위에 나열된 내용들은 입증할 꺼리들이 수두룩하고, 박갑동의 발언 번복도 신빙성이 없다,

인민유격대가 무장폭동을 최종 결정한 때가 3월 중순이라는 것은 확인된 사항이고, 문상길이가 제주경찰서를 습격하지는 못했지만 그 계획이 존재했슴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남로당에서 파견된 지도원들도 수두룩하다, 다만 그들은 가명을 쓰고 '오르그'로 명칭되기에 실명 확인이 안될 뿐이다, 남로당은 점조직으로 비밀스럽게 운영되는 단체였다,

'오르그'는 상급단체에서 내려온 '지도원'을 일컫는 말로 북한의 '정치지도원'과 같은 존재들이다, 인민군에도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지도원이 있었는데, 심지어 전투의 전진이나 후퇴도 지도원의 허락이 필요했고, 지도원은 명령에 불응하는 자들을 현장 사살하는 즉결처분권도 가지고 있었다, 중국 인민군의 전투를 그린 영화 '집결호'에도 전투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도원이 등장한다,

4.3사태 전반에는 이 오르그들이 도처에 등장한다, 저서에서나 증언자들의 발언에서도 이 오르그들은 등장하며, 정치지도, 현지지도가 목적인 이들은 철저히 베일에 싸여졌으며 비밀요원같은 존재들로, 비밀유지 차원에서 수시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4.3을 배후조종한 세력이 있다면 바로 이들이고, 이들이 남로당 중앙당이나 전남도당에서 파견된 지도원들이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전남도당의 하부조직이었으며 제주도당의 '도'는 道가 아니라 島였다)

제2대 인민유격대 사령관이었던 이덕구도 '원래 그쪽(좌익) 사상이 아니었는데 오르그의 공작으로 그쪽(좌익)으로 넘어갔다'는 증언도 존재한다, 그리고 보고서에 인용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 보고서'의 내용에도 오르그가 등장한다, 무장폭동을 최종 결정하는 3월 15일의 도상위 회합에 전남도당에서 파견된 오르그가 참석한 것이다,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는 경찰 특공대가 이덕구를 사살하는 과정에서 입수한 문건으로, 입산 무장대가 무장폭동의 이유와 과정을 스스로 작성하여 소지한 문건인 것이다, 인구에 회자되는 어느 문서보다 가장 확실하고 무게가 있는 문서임에도, 여기에도 오르그가 등장하는데 4.3위원회는 남로당과의 연관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 3.1투쟁 직후 도당의 지시에 의하여 각 면에 조직부 직속 자위대를 조직하게 되었으나 별로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후 사태가 더욱 악화됨을 간취한 도상위는 3월 15일경 도(道) 파견 '올구'를 중심으로 회합을 개최하여 첫째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서, 둘째 단선. 단정 반대 구국투쟁의 방법으로서 적당한 시간에 전도민을 총궐기 시키는 무장 반격전을 기획 결정하였다 -

무장폭동의 주도자들이 직접 작성한 문서에 도(道) 파견 '올구'를 중심으로 회합을 개최하여 무장 반격전을 기획 결정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상부조직인 전남도당에서 내려온 오르그가 상임위원회 회의를 주재하고, 그 회의에서 무장폭동의 최종 결정을 내렸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남로당의 전신은 위계질서가 엄격한 조선공산당이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선공산당 제주도당에서 간판만 바뀌었을 뿐 구성인원이나 모든게 조선공산당 그대로였고, 모든 것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4.3사건은 제주도당이나 전남도당에서 자체 결정할 수 있는 행사가 아니었다,

무장폭동의 주체인 남로당 제주 인민유격대의 문서에도 상부에서 파견된 오르그가 폭동 결정에 참여했다고 증언하고 있고, 남로당 중앙당의 고위직이었던 박갑동 역시도 '중앙당의 폭동 지령이 떨어졌다고 증언하고 있다, 상부와 하부에서 공통된 증언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4.3위원회가 박갑동의 중앙당 폭동 지령 발언을 부정하는 이유의 하나로 박갑동이가 "내 글을 신문에 연재할 때 외부에서 다 고쳐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발언은 근거가 희박하다, 그 발언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부지런히 검색했더니, 4.3취재반이 일본에 건너가 박갑동으로부터 들은 내용이라고 어느 글에 나와 있었다,

박갑동이가 말하는 '외부에서'란 정보부의 소행을 지칭하는 것이었는데, 박갑동은 일본에서 글을 썼는데 정보부가 관여했다는 것도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진술 번복하기는 김일성 교시록에서도 특히 강조하는 좌익들의 주요한 투쟁 무기이다, 우리나라의 민주화투사들도 종종 고문 때문이라고 자백을 번복하는 일이 왕왕 있었다,

일본까지 찾아갔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일본판을 확인해보면 간단한 일이다, 그리고 박갑동같은 주요 인사의 발언을 의심하고 묵살하면서까지 일개 취재반의 발언을 근거로 4.3무장 폭동의 주요한 정체성을 판단하는 근거로 삼았다면 이것은 진상조사가 아니다, 역사적 인물의 발언을 무시하고 지금 정체도 알 수 없는 개인의 발언을 근거로 삼는 보고서는 '4.3 논설'이고 '4.3 소설'이다,

4.3위원회는 4.3 무장폭동의 주범이자 제주도민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남로당에 면죄부를 주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눈에 훤히 보이는 것도 눈 감고 선명하게 들리는 것에도 귀를 막았다, 일본까지 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도 남로당의 관계를 확인할 길은 수없이 있었다, 좌익정권과 좌익 위원회의 모든 황당한 것들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일까,
 
4.3의 진실은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기 위하여 일으킨 무장폭동이다, 그러나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이하 4.3위원회)'는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이하 진상보고서)'를 통하여 입증할 만한 문서가 없다는 이유로 4.3무장폭동과 남로당과의 관계를 부정했다, 이것은 좌익을 위한, 좌익에 의한 또 하나의 역사 왜곡이다,

실제로 남로당의 폭동 지령 문건도 존재하고 있었다, 1948년 1월에 남로당 제주도당 연락책이 경찰에 체포되어, 그 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남로당의 정체를 실토하게 된다, 경찰은 1월 22일 밤, 김달삼이가 조직부장으로 있는 도당 조직부 아지트를 급습하여 불법집회를 열고 있는 남로당원들을 검거하는 와중에 문제의 문서들을 입수하게 된다,

이 문서에는 '2월부터 3월 5일 사이에 폭동을 일으키고' '총선거와 군정을 반대하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라' 등의 내용이 들어 있다고 미군 정보 보고서와 미군 방첩대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4.3위원회는 좌파쪽 자료에서 이 자료를 '유언비어'라 주장한다는 이유와 정보의 신뢰도가 낮게 평가됐다는 이유를 들이대며 문서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4,3위원회는 유언비어라 주장하는 좌파쪽 자료가 무엇인지, 그 근거가 무엇인지 일체 밝히지 않고 있다, 정체불명의 자료와 '...아닌가 하는 개연성이 있다'는 추측성 주장으로  명확한 존재의 자료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미군측 자료는 윤색과 과장이 난무하는 4.3의 자료들 중에 가장 균형있고 권위있는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남로당 중앙당 고위직이었던 박갑동의 저서에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에 대한 '적극적인 보이코트' 지령에 따라 남로당이 대대적인 무장폭동 장소로 택한 곳이 제주도'라고 밝히고 있다, 보고서에서 인용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의 문구에서도 남로당의 개입은 확실하게 증명된다,

- 파견원이 최후적 지시를 가지고 국경 프락치를 만나러 갔던 바 프락치 2명은 영창에 수감되어 없었음으로 할 수 없이 횡적으로 문상길 소위를 만났던 바 이 동무의 입을 통해서 국경에는 이중 세포가 있었다는 것, 그 하나는 문 소위를 중심으로 해서 중앙 직속의 정통적 조직이며 또 하나는 고승옥 하사관을 중심으로 하 제주도 출신 프락치로의 조직이었음.

그래서 4.3투쟁 직전에 고 하사관이 문 소위에게 무장투쟁이 앞으로 있을 것이니 경비대도 호응 궐기해야 된다고 투쟁 참가를 권유했던 바 문 소위는 중앙 지시가 없으니 할 수 없다고 거절한 바 있었다고 함.

이 말을 듣고 도 파견 국경 공작원은 깜짝 놀랐으나 이렇게 된 이상 어찌할 수 없으니 제주도 30만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고 또한 우리의 위대한 구국항쟁의 승리를 위하여 기어코 참가해야 한다고 재삼 재사 요청하였으나 중앙 지시가 없음으로 어찌할 수 없다고 결국 거절 당했음. 이리하여 4.3투쟁에 있어서의 국경 동원에 의한 거점 분쇄는 실패로 돌아갔음. -

4.3위원회는 이 기록이 남로당 중앙당이 4.3무장폭동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는 단서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4.3 직전의 상황에 대한 이해나 남로당의 조직 생리를 알고 제대로 있었다면 위 기록은 남로당 중앙당의 개입이 있었다고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4.3 무장폭동이 있기 두달여 전 남로당에서 내려진 2.7 구국투쟁은 사실상 전국에 내려진 무장 폭동의 명령이었다, 4.3 무장폭동은 1948년 2월 말에서 3월 초 즈음 제주도당 책임자와 면당 책임자들이 모인 '신촌회의'에서 김달삼에 의해 최초로 제기 되었고, 12대 7로 가결 되었다, 여기에도 오르그가 있었고 오르그는 항상 있었다고 한다,

신촌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중앙당의 승인을 받기 위하여 오르그에 의해 중앙당으로 올라갔을 것이고 3월 중순에 다시 오르그에 의해 제주도로 하달 되었을 것이다, 3월 15일 전남도에서 파견된 오르그에 의해 주재된 상임위 회의가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에서 무장폭동이 최종적으로 결정된다, 상임위 회의는 남로당의 지령 하달식이었다,

다만 봉기 날자와 시각의 결정은 제주도당에 위임되었다, 현지 사정에 맞게 날짜와 시간을 잡으라는 중앙당의 배려였을 것이다, 4월 3일 새벽 2시로 봉기 시각이 결정된 때는 3월 28일이었다, 무장폭동이 일어나기 바로 5일 전이었다, 바로 이 촉박한 날짜 때문에 위 기록에 나타나는 혼선이 빚어지게 되는 것이다,

당시 남로당의 '세포' 혹은 '프락치'들은 요소에 박혀 있었다, 당시 중학원의 한 학급이 전부 남로당 세포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남로당의 조직은 비밀조직이었기 때문에 같은 반에 같은 친구이고 같은 세포이면서도 서로의 정체를 모를 정도였다, 자기와 연결된 라인의 인물만 알 수 있었고, 모든 명령이나 연락은 같은 라인에서만이 가능했다, 프락치도 비슷한 경우였다(프락치와 세포는 비슷한 용어이다, 수동적인 입장의 남로당 비밀당원은 세포로, 능동적으로 남로당의 간첩질을 하는 경우라면 프락치로 쓰려고 노력했다),

당시 제주에 주둔한 9연대에도 인원의 절반 이상이 남로당의 세포였고, 위 기록으로 보아 프락치는 2개 라인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중앙당 라인으로 문상길 소위였고, 하나는 제주도당 라인으로 고승옥 하사 외 1인이 등장한다, 문상길 소위와 고승옥 하사는 서로 남로당원임을 알고 있는 사이임을 알 수 있다,

김달삼이가 무장폭동을 세웠을 때 국군경비대를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무장대는 파출소를 습격하고 경비대에게는 제주경찰감찰청과 제주경찰서를 기습 점령할 임무를 부여했다, 경비대에 남로당 세포들이 많기에 가능한 계획이었다, 그리고 '파견원'이 사전에 경비대 프락치를 접촉해 내락을 받아 둔 상태에서 거사 1~2일 전에 최종 확인을 하러 경비대 프락치를 만나러 왔다가 문상길에게 거절 당하는 장면인 것이다,

파견원이 최종 확인을 하러 경비대에 찾아갔을 때 사전에 연락을 해두었던 도당 프락치는 영창에 가버리고 대신 중앙당 프락치 문상길을 만나게 되었는데, 문상길 소위가  '중앙 지시'가 없다고 했던 것은 지시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지시가 채 내려오지 못했던 것이다,

28일 결정된 사항은 문상길에게 바로 올 수 없었다, 중앙당 라인은 중앙당 지시만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8일 결정된 봉기 날자는 도당에서 중앙당으로 올라가 다시 중앙당에서 문상길에게로 와야 했었는데, 제주도당이 거사 날짜를 너무 촉박하게 잡음으로서 3~4일 사이에 미쳐 문상길에게까지 도착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달삼의 계획이 중앙당까지 도착한 것은 확인할 수 있다, 중앙당 고위직이었던 박갑동이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박갑동의 저서에 나온 감찰청과 경찰서 습격 장면이 허구의 상상이라면 그것이 김달삼의 계획과 꼭같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제주도당과 중앙당은 같은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고, 문상길의 거부로 감찰청 경찰서 습격은 발생하지 않았으나 박갑동은 50년에 월북하게 됨으로서 중앙당에서 취득했던 정보가 이미 실행된 사건으로 착각해버린 것이다, 이것은 지난 세월에 그만큼 4.3 사태의 정보가 많이 부족했던 사실도 증명하는 셈이다,

중앙 지시가 없었다는 문상길의 문장 하나로 4.3위원회는 하늘을 가릴려는 모양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폭동 지령은 문상길에게 가지 않는다, 문상길에게는 협조 명령이 갈 뿐이다, 문상길이가 없었다고 한 것은 폭동 지령이 아니라 협조 지시가 없었다는 것이다, 얼마 후에 문상길은 경비대 세포들을 이끌고 박진경 9연대장 암살에 성공한다, 이것은 '중앙지시'가 있었을까 없었을까,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하건 무장 폭동을 단선 단정을 반대하는 구국투쟁이었다고 제주도 인민해방군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흉내내는 4.3위원회는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 북조선이 성립하자 제주 인민해방군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쳤다, 단선 단정 반대의 구국투쟁이었다면 그 인민공화국에도 반대 소리를 높여야 되지 않을까,

4.3진상보고서는 무식과 붉은 물감이 철철 흐른다, 비전문가가 썼다고 하는 것은 칭찬이다,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며 파출소를 습격하던 인민해방군들이 죽창 대신 붓을 들어 갈겨 쓴 것 같다, 국민의 혈세로 이따위 책을 만들어낸 사람들에게 세금을 낭비한 죄를 물어 재산이라도 압류하고 싶다, 차라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라고 권하고 싶다,

[비바람 시스템클럽 회원논객: http://systemclub.co.kr/]

관련기사

뒤로가기 홈으로

인기뉴스

URL 복사
x

PC버전 맨위로 갱신

Copyright ⓒ 올인고리아.. All rights reserved.